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임인영


민주화운동내용

‘인혁당재건위’ 사건 진상규명활동, 남민전관련자 불고지죄


사망일자

2003년 11월 29일


나이

69세


직업

무직


관련자인정

2013/10/14 (399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35년 6월 16월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54년 2월 공주사범학교 졸업

1954년 3월 ~ 1955년 3월 서울 방산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1968년 ~ 1974년 그린양장점 경영

1974년 ~ 1980년 6월 인영의상실 경영

1974년 4월 ‘인혁당재건위’ 사건 발표됨

1974년 7월 1일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 8명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 남편 전창일,무기징역 선고

1974년 ~ 1979년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를 위한 구명운동, 진상규명 활동

1979년 10월 11일 임인영, 남민전기 제작혐의, 이재문 등을 만난 사실 불고지죄 등으로 검거, 구속, 수사과정 고문, 가혹행위를 당함

1979년 12월 7일 석방

1980년 5월 2일 서울지방법원, 징역1년 집행유예2년 선고

1982년 12월 24일 전창일 형집행정지 출소

2003년 11월 29일 고문 후유증으로 신경쇠약, 만성적인 불면증, 간염 등의 치료를 받던 중 사망

2014년 5월 3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2. 민주화운동 내용

임인영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의 처로서 1974. 4.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발표되고 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선고, 남편인 전창일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 상황 속에서,

1974. 11. 종로구 종로5가 소재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여 약 2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안혁당은 독재정권에서 조작한 것이다, 인혁당은 중앙정보부에서 40일간 고문해서 조작한 것이며 공판기록도 변조되었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낭독하고, 1975. 8. 15. 임인영이 작성한 ‘공판기록변조’라는 제하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공판기록이 허위 날조되었다는 진정서 5부를 청와대, 정보부, 법무부에 각 1부씩 발송하고, 1976. 6. 13.경 관련인 명의로 된 “인혁당사건은 이렇게 조작되었다”라는 내용의 원고 1부와 “한국은 이렇게 인권탄압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원고 1부를 미국 불상거 주 시놋트신부에게 전달케 하고, 1974. 4. 말경 성북구 석관동 소재 관련자의 집으로 찾아온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이재문을 남편과 함께 동년 5. 2.경까지 자택에 은신케 하는 등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발표된 직후부터 동 사건 관련자의 구명운동과 동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적으로 주도하였다.

임인영은 이러한 활동을 지속하던 과정에서, 1979년 10월 11일 남민전기 제작혐의, 이재문 등을 만난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죄목 등으로 검거, 구속, 수사과정 고문, 가혹행위를 당하다 1979년 12월 7일 석방되었다. 임인영은 조사, 수감과정에서의 고문, 가혹행위로 고통받다 2003년 11월 29일 고문 후유증의 영향으로 사망했다.

3. 열사 관련 기록

“ 이 간증수기는 ... 결코 거짓일 수 없습니다 ... 1979년 10월 11일, 남민전사건으로 저는 감옥보다 더 무서운 간첩을 취조하는 곳으로 연행되어 갔습니다 ... 며칠이 지나 취조가 끝나고 집에 보내주겠다고 할 무렵 저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형수의 옷을 걷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저는 무서웠습니다 ... 저는 그 취조과정이 너무도 잔인하고 가혹하여 제 힘으로는 도저히 견달 수 없었습니다 ... 너무도 원통하고 억울하여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 취조관이 저를 취조하려고 또 불러내갔습니다 ... 취조관은 저에게 옷 사건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 취조관이 며칠을 더 취조해보더니 ... 수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저에게 끝까지 누명을 씌우는 대구 여자와 만나게 하여 판가름을 하라는 상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그 여자가 대구에서 올라와 지금 옆방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 취조관 몇 명이 들어와 저를 취조하는 것입니다.”

- 김수환추기경에 보낸 임인영의 간증수기 1982.경 작성 -



“ 저는 민주화 명예회복을 기다리는 고 임인영의 자녀 전재연입니다 ... 제 아버지 전창일은 아시다시피 세칭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감형되어 8년 8개월을 복역하고 나오셨습니다. 그 세월 동안 어머니 임 인영은 여자로서 아내로서 참 많은 힘든 시간들을 살아 왔습니다. 남편이 이유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구속되어 군사 비밀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으면 천붕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남편 이상의 존경심을 가진 지아비였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아버지 석방 운동을 엄마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아니?” 하며 말씀하시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 이렇듯 어머니 임 인영은 구명운동을 한 동기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보답이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정의감이 강한 분이였습니다. 1954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교편을 꺽은 이유는 육성회원 자녀의 시험점수를 올리는 교장의 비리를 보고 시정을 요구 하다가 한계를 느껴 그만두고 개인사업 의상실을 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도 선망의 직업인 교사를 초개처럼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가 아버지 공판기록에 ‘아니오’라고 진술한 재판정에서의 진술이 ‘예’로 바뀐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교편생활을 하였듯이 글을 잘 쓰는 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쓴 친필 호소문 종이가 방바닥에 항상 널려 있어서 저는 당시 초등학생으로 까치발을 하고 방 사이를 다녔고 큰언니는 먹지를 데고 여러 장 카피하여 쓰느라 손이 시커멓게 되곤 했습니다. 이러한데 남민전 사건의 이 재문으로부터 호소문을 받아 구명활동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의롭게 호소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의 구명활동을 한 부분이 절하되는 것이며 자녀로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

인혁당 사건의 사법살인이 있은 후 사형수들의 시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불태워 지려할 때 목요기도회에서 호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리고 현장으로 함께 가자고 호소를 하였고 그 당시 참석자 모두가 응암동으로 이동하여 사투를 벌였으며 벽제화장터로 가려는 운구차를 저지하려고 바퀴 밑에 들어가 저항하다 문 정현 신부님은 다리가 불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어머니의 구명활동은 청와대,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 언론, 해외 외신 등에 진상규명을 알리며 목요기도회, 명동성당 미사 등 호소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동분서주 호소문을 들고 낭독하였습니다. 인혁당 조작사건의 알림부터를 시작으로 피해자들이 가정으로 돌아오기 까지 어머니 임 인영의 구명활동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만약 어머니의 활동이 없었다면 인혁당 사건이 조작대로 세간에 알려졌을 것이고 아마도 제 아버지는 우리 곁에 안 계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녀로서 해봅니다. 누군가는 운동가, 투쟁가인 사람들은 이념이 있으며 사상이 불온하지 않나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이념이 없어도 사상이 없어도 운동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말하곤 하였습니다. ‘억울하고 억울하고 너무 억울해서 악이 받친다고요’ 그 심정을 아시나요? 악이 받쳐서 나가서 호소래도 해야지 살 수 있는 심정이었다는 것을요 ...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 임인영의 3녀 전재연의 진술 2013.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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