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 출생
1979년 2월 동산초등학교 졸업
1982년 2월 동성중학교 졸업
1985년 2월 진흥고등학교 졸업
1986년 3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 가입, 활동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피격
1987년 7월 5일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뇌손상으로 사망
- 7월 9일 민주국민장 거행
-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이한열은 19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 5.18광주학살 사진 및 비디오 영상을 접한 후 고향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에 치를 떨며 1980년 광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로이 인식하고 군부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학생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곧바로 교내에 있는 학생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사건이 있던 1987년에는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다음 날 개최 예정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10국민평화대행진)’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 정문 앞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당시 일부 전경들이 시위대를 향해 불법적으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한열의 경우가 그런 사례였다.
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은 이한열이 같은 대학 대학생 이종창에게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촬영했으며, 그 처절하고 애처로운 사진이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즈 등에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되어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과 잔인성이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한열 ‘최루탄피격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직후에 발생한 일이어서 학생, 시민들을 더욱 충격 속에 몰아넣었으며, 이는 전 국민의 분노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 여명이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서울 및 각 시도 도심을 장악하여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거국적 민주화 혁명의 양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1987년 6월 29일, 전두환의 군부권위주의 정권과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국민들의 강력한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의 내용이 담긴 ‘6.29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한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이한열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해 7월 5일 뇌손상으로 인한 심폐기능 정지로 사망하였다. 사후 5일이 지난 7월 9일 ‘애국학생 故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학생·시민·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하였고 그의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묻혔다.
민주여
민주를 외치는 마음은 결코 서러워서는 안된다.
민주!
또는 외로와서도 안된다.
홀로 목소리가 작아
자신이 없는
그러나 우리 곁엔 민중이 있다
울려퍼지는 소리 민주!
오 민주,
모든 아픔과 슬픔과 그리고
괴로움과 더욱이 슬픈 마음을
모두 움직여 우는 소리
민주여!
죽어 다시 소리칠 수 있다면
내 힘 다해
더불어 민중들의 소리,
민주여,
한 송이의 탐스런
生命의 꽃을
혁, 너에게 바친다.
가시가 돋힌 장미
밤에 피는 장미가 아닌
생명의 꽃, 삶의 꽃
의무의 꽃, 시위의 꽃
행동의 꽃을 바칩니다.
* 꽃은 어디에나 핀다.
그래서 아름답다.
- 이한열 열사를 위한 추모집 모음집 중 "민주여“ -
[민주화운동기념공원] 17406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 30 T.031-8011-9710 F.031-8011-970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6029 경기도 의왕시 내손순환로 132 T.031-361-9500 F.031-361-9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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