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5월 6일 전남 장성 출생
1980년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5.18민주화운동 참여(부상자 후송)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
1985년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 활동 중 구속(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 조선대학교 학사징계(제적)
1986년 항소심 징역 2년, 자격정지 1년 확정
1987년 가석방
-전남지역구속학생동지회 부위원장
-복적추진위원회 부위원장(총장실 점거농성 113일)
1988년 3학년 2학기 복적
1989년 ‘민주조선’ 교지편집위원장 활동 중 수배
- 5월 3일, 제4수원지 청암교 부근 경찰 검문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
- 5월 10일, 오전 11시 30분경,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
- 11월 4일,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 거행
-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이철규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하였다. 그는 입학과 동시에 대학 내 통일지향적 학생운동 단체인 민족해방계열(NL)의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다 1985년 구속과 동시에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6년에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1987년 6.10항쟁이 일어나면서 가석방되었다. 이철규는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재소자의 인권개선을 위해 투쟁하였고,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단식투쟁에도 참여하였다. 출소 후에는 제적된 상태로 ‘전남지역구속학생동지회’와 ‘복적추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조선대학교 총장 박철웅을 상대로 한 조선대 학원민주화 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8년에 학적이 복적되어 복학되었다.
학교에 복학한 이후 1989년 1월 이철규는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의 편집장을 맡았고, 그해 4월 노태우 정권은 ‘민주조선’에 실린 북한 관련 내용을 문제 삼아 이철규를 포함한 편집위원 전원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수배로 은신해 있던 이철규는 같은 해 5월 3일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중 제4수원지 청암교 부근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았고 당일 행방불명되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5월 10일 오전 11시 30분경, 이철규는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이철규가 경찰의 눈을 피해 철조망을 넘어 수원지로 들어가 물가를 따라 이동하던 중 청암교 석출다리 하단을 지나다 미끄러져 추락, 익사한 것으로 수사를 종결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25세였으며, 1989년 11월 4일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꽃잎처럼 지는 것을 슬퍼하진 말거라
분노의 계절이오면 시퍼렇게 살아오는데
투쟁으로 일어서는 피맺힌 함성소리
따라서 울부짖는 못다한 피의 영혼아
또다시 타네 그대몸이 거역의 몸부림으로
오늘도 사라지는 부릅뜬 반란의 눈동자여
겨우내 얼어붙은 새날이 오면
다시 태어나서 우뚝 서리라.
- ‘영혼의 노래’, 이철규 열사 추모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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