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3월 15일 전남 광주 출생
1980년 3월 광주송원고등학교 입학
1983년 2월 광주송원고등학교 졸업
198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입학
1986년 3월 18일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산하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1986년 4월 28일 전방입소 결사반대 및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1986년 5월 26일 한강성심병원에서 사망
1994년 5월 광주 일곡동 선산묘지에서 망월묘지공원으로 이장
1986년 4월 28일 아침 9시 30분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00여명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장이던 이재호는 자연대 학생회장이던 김세진과 함께 전방입소거부투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 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리며 강제 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폭력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이재호와 김세진은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이재호는 전신 60%의 3도 화상을 입었고, 결국 버티지 못하였다. 김세진은 1986년 5월 3일에, 이재호는 5월 26일에 꽃다운 청춘 21세를 끝으로 각각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저는 현재 부모님께서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의식주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행동거지가 퍽 부담스러운 까닭에 원하는 공부를 깊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역할을 분명히 수행, 책임지고 난 다음 틈틈이 독서를 함으로써 자신의 방만함과 타락의 씨앗을 근원에서부터 제거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물질적 봉양만으로 생각지 않고 있으며 효도는 첫째, 올바르게 사회에 봉사하는 의연한 삶을 개척하는 것 둘째, ‘승리’로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힘든 결단을 가능케 하였으며 현재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절대적 기초입니다. 물론 예고 없는 저의 결단으로 인한 충격에서 오는 부모님의 슬픔과 노여움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저의 생각과 행동이 결코 공허한 불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이 장기적 전망과 믿음 속에서 증명되는 날, 기쁨의 해후를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제가 어떻게 된다면 화병이 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젊으셨을 때 활동으로부터, 아버님의 의연하심으로부터, 저는 최근의 문제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때, 제가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할 때, 저는 자신감을 상실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패배라는 묘비명을 남길 뿐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기쁨과 슬픔을 포옹으로 표현한다지만, 역사적으로 우리 집에서의 정(情)과 한(恨)의 응어리들은 가장 솔직한 삶을 서로 드러낼 수 있는 것에 의해 하나하나 풀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전부터 저는 자신의 삶을 준비해왔고, 비로소 드러냈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누님과 동생들에게는 의연함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의 생활과 주변에 관계되는 것들은 스스로 해 나갈 수 있으므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편지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운 날짜에 다시 연락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건강히 계십시오.
1986년 4월 2일 저녁 12시 서울에서 재호 올림
- 부모님께 드린 마지막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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