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6월 25일 강원도 양양 출생
1981년 속초고등학교 졸업
1984년 방위병으로 입대
1988년 자동차 정비기능사 2급 자격증 취득
1989년 4월 경남 창원시 소재 ㈜통일 입사
1990년 5월 3일 오전 8시경, 분신 후 투신 사망
1990년 5월 화장 후 대청댐에 산골, 양산솥발산공원에 추모비 건립
㈜통일의 조사통계 차장이었던 이영일은 사측이 민주노조를 지속적으로 탄압하고 또 그 과정에서 투병 중인 자신의 노모까지 찾아가 “자식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만두게 하라”고 협박하는 등 비인간적인 작태를 보이자 이에 항거하여 1990년 5월 3일 분신하였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자 전노협과 현대중공업, KBS 등의 민주노조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탄압을 가하였다. 이는 마산·창원지역의 중심 노동조합인 ㈜통일 노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측은 1989년 테러, 구속, 해고 등을 통한 노조 와해 시도에 이어, 1990년에 들어서도 구속자와 수배자에 대한 복직 약속을 어기는 등 탄압을 지속하였다. 이 같은 상황 등으로 ㈜통일 노조는 지도력의 공백과 현장 조직력이 약화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영일은 사망 하루 전인 1990년 5월 2일 저녁, 친구와 술을 마시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중풍으로 쓰러져 7년 동안 투병 중이던 어머니에게 형사들이 찾아가 자식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만 두게 하라고 협박했다”며 괴로워하였다. 이로 미루어 이영일은 회사와 경찰의 집요한 노조탄압에 분노하는 한편,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노조 간부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인 5월 3일 오전 8시경에 출근하여 제1공장 식당 옥상으로 올라가 “군부독재 타도, 노동탄압 중지, 회사는 각성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그는 동료들에 의해 즉시 창원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전 10시 50분경 꽃다운 2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노태우 정권이 1990년 1월 20일 노동‧상공‧재무‧내무‧법무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7개부처 관계장관들을 합석시켜 '산업평화 조기정착과 임금안정을 위한 대책회의'를 열고 그 회의에서 전노협을 법외단체로 규정한 후 전노협에 가입한 노조들의 탈퇴를 유도하기도 하고 전노협 행사의 원천봉쇄,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구속‧수배, 가입노조들에 대한 전면적인 업무 조사와 탈퇴유도공작을 실시한 사실, 치안본부는 기업주의 112 신고만으로도 쟁의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악성노사분규에 대한 경찰력투입대책’을 마련한 사실, 이 과정에서 ㈜통일은 전노협탈퇴 유도대상노조가 되어 1990년 2월부터 건외 296개 노조와 함께 업무조사를 받은 사실 등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관련자의 사망은 위와 같은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노태우 정권의 노조 정책에 항거하여 노동기본권을 찾기 위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함.
- 민주화보상위원회, 「이영일 인정 결정문」(제80차 본위원회 200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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