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 14일 충북 충주 출생
1963년 2월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3년 3월 동국대학교 농림대학 농학과 입학
1965년 4월 13일 한일회담반대 및 평화선사수 투쟁 중 경찰봉에 두부 부상
1965년 4월 14일 서울대학병원 응급실 도착
1965년 4월 15일 치료 중 두개골 저골절상 및 과잉출혈로 사망
1996년 2월 동국대 명예졸업
1996년 충주 선산 안장
2014년 5월 15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김중배는 동국대학교 농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5년 4월 13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및 평화선사수’ 성토대회를 마치고 서울 중구 퇴계로 대한극장 부근에서 시위하던 중 경찰의 곤봉에 두부를 맞고, 4월 15일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 치료를 받던 중 두개골 저골절상으로 사망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김중배가 사망하기 세 달 전인 1965년 1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6.3항쟁’ 이후 그동안 답보상태에 놓여있던 한일회담이 1965년 1월 18일에 재개되고 2월 17일 일본 외상이 한일협정 ‘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방한하자 당시 대학가에서는 한일회담반대투쟁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일인 1965년 4월 13일 오후 12시 30분경, 김중배의 모교인 동국대학교 교정에서는 “제2의 을사조약 즉각 철회하라”, “상륙하는 게다(일본나막신) 소리 몽둥이로 때려잡자” 등의 구호와 함께, “오늘 또 다시 조국수호의 대오를 정비하여 민족의 염원과 역사적 사명에 부응한다” 등의 평화선사수투쟁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선언문 낭독 이후 1천여 명이 “반민족적 가조인은 전면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등의 7개 항목을 결의하고 가두시위를 벌이기 위해 오후 1시 40분경 교문을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내 충무로 4가에서 경찰과 충돌하였다. 시위대는 퇴계로와 쌍림동 방향으로 나누어 흩어졌고, 잠복하고 있던 경찰이 시위대를 추격하였다. 김중배는 이 과정에서 골목으로 피신하던 중 경찰봉에 두부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현장을 빠져나와 오후 3시경 쌍림동 35번지의 한 민가로 간신히 피신하였다. 당시 김중배와 함께 피신한 친구 임정규 외 동국대생 5명은 각각 3명씩 짝을 이뤄 몸을 숨겼으나, 경찰의 집요한 수색으로 골방에 숨어 있던 김중배와 그 외 2명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이 경찰에 체포, 연행되었다.
경찰이 빠져나간 뒤 집주인 정씨가 김중배를 2층으로 데려가 연고로 응급치료를 한 뒤 30분 정도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를 하였으나 이미 그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김중배와 함께 있던 친구 2명은 김중배를 그의 누이가 거주하고 있는 신당동으로 데려갔고 그는 을지로 6가에 위치한 구세이비인후과 의원에서 다시 응급치료를 받았다. 부상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의사는 급히 시립중부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러나 시립병원과 수도의대병원의 입원실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 김중배는 뒤늦은 14일 새벽 0시 15분경 간신히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지만 안타깝게도 4월 15일 오후 8시경 꽃다운 2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날. 4월13일! 누구보다 국가를 사랑하던 형의 성난 사자처럼 포효하며 거리를 내달리던 얼굴. …‘평화선 사수하라’는 형의 목소리도 이제까지 귀에 울려옵니다. 이제 무섭게 다문 입, 야무진 모습, 근엄하게 학업에 열중하던 형의 모습. 오늘도 남산의 푸른 언덕, 이 삼보의 언덕에는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꽃이 피고 있습니다만 형은 어이하여 우리 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 1965년 4월23일 거행된 김중배 열사 장례식 추도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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