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3월 21일 전북 장수 출생
1979년 3월 빈암 중학교 입학(3학년 중퇴)
1985년 동대문시장 재단사
1988년 7월 ㈜서광 구로공장 입사
1989년 1월 쟁의부장 임명
1989년 4월 노조파업 시작(민주노조 탄압분쇄․임금인상․독자운영 쟁취)
1989년 5월 4일 오후 13시 15분경, 분신, 저녁 23시 30분경,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사망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당시 ㈜서광 노동조합은 1989년 4월 부평지부와 구로지부에서 통합대의원대회를 열고 노조위원장으로 부평공장 출신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선출된 노조위원장은 이미 사측에 포섭되어 있던 어용 노조위원장으로서 구로지부에 집행부를 꾸리지도 않았고, 더욱이 4월 4일에는 구로지부 임원 4명을 제명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반발한 구로지부 조합원들이 집행부의 조속한 구성과 자주적 노조활동 보장, 제명철회 등을 요구하며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파업이 12일째로 접어들면서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사측이 삼미노조 연대투쟁에 참여했다가 귀사하던 구로지부 간부 5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4월 18일,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후 1989년 5월 3일, 구로지부 조합원과 사측은 협상을 통해 ‘쟁의기간 임금 90%이상 지급,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노조간부 3인에 대한 징계처리를 최대한 가볍게 한다.’ 등의 사항에 구두합의 하였다. 그러나 협상 다음 날인 5월 4일, 사측이 합의사항을 번복하면서 협상은 다시 결렬되었다. 이에 당시 쟁의부장이었던 김종수가 사측의 탄압에 맞서 “무노동․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 “동지들을 처벌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그 자리에서 분신하였다. 김종수는 공안정국의 ‘무노동 무임금’ 논리와 회사․본조의 지부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다 밤 11시 30분경 23세의 나이로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서광노동조합은 ’88년에 부평과 구로의 통합대의원대회를 열었고, 이때 선출된 부평공장 출신 위원장은 구로지부 집행부를 꾸리지 않았다. 이에 구로지부 조합원들은 조속히 꾸릴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5월 3일 회사 측과 협상한 결과 ‘쟁의기간 임금 90%이상 지급,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노조간부 3인에 대한 징계처리를 최대한 가볍게 한다’고 약속하였으나 다음 날에 약속을 번복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당시 쟁의부장이던 김종수는 이에 격분하여 “민주노조 사수하자” “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 “동지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그는 이날 밤 11시 30분경,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공안정국의 ‘무노동 무임금’ 논리와 회사, 본조의 지부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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