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월 7일 서울 출생
1980년 서강대학교 문과대 입학
1983년 서강대 민주화 시위 주도로 구속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대중모임 ‘대나무’에서 활동
1986년 구로 동일기업 노조설립 투쟁으로 구속
1990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노동분과 국제분과 연구원
1991년 서강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
1992년~1993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홍보부장
1994년 2월 19일 위암으로 사망
1994년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2015년 4월 06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김상옥은 1979년 10.26사건과 12.12군사반란, 그리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차 현실에 눈을 뜨게 되어, 동문선배의 권유로 향린교회 대학부 모임에 참가하면서 사회모순과 지식인의 역할 등이 담겨있는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2학년 때는 서클 ‘江’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운동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졸업정원제, 강제징집 등의 문제와 광주학살의 책임을 물으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던 당시에 학내 시위에 가담하면서 소위 ‘요주의 운동권’으로 찍혔다. 4학년에 들어 영장을 받았으나, 군 입대를 하루 앞둔 3월 24일 인문사회관 3층 난관에 올라서서 ‘학우여’를 연발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하다가 1983년 12월 석방되었다. 출소한 김상옥은 노동운동을 고민하게 된다. 첫 발을 들여놓은 곳은 농약을 포장하는 회사였고, 지독한 농약냄새를 마셔가며 처음으로 힘든 노동을 하게 되지만 김상옥은 즐겁게 생활했으며, 우연히 구로공단 내 선진적인 남성노동자들을 양성하는 조직, '대나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동일기업에 입사하여 노동조합설립을 위해 싸우다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되어 두 번째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석방된 뒤 한국민주노동자연합, 남부지역금속노동조합에 참여하였고 다시 철공장에 취업하였으나 작업 중 허리를 다쳐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서강대 민주동문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위암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김상옥동지!
왜 이리 성급히 떠났습니까?
동지의 이성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동지의 너무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동지를 몰아대 불치의 병까지 얻게 한 것입니까?
이 반동의 바람은 거세긴 하지만 역시 지나가는 바람일 뿐인데, 왜 동지는 끝내 견뎌내지 못했나요?
...
동지가 이승에서 민중과 더불어 이루려 했던 일은 이제 우리 살아남은 자들에게 맡기시고, 어딘지 모를 데로 훌훌 떠나십시오.
동지가 지향했던 목표, 동지가 가졌던 순수함과 열정, 사심없고 모범적인 실천은 우리의 가슴과 머리에 살아남아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김상옥동지,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뒷 일은 우리가 감당하겠습니다.“
- 채만수, “김상옥동지 영전에”, 『정세연구』 1994. 3. -
“한 사람이 있었다
밤늦도록 둘러앉아 얘기하는 자리라면
깡소주에 안주가 없어도
두, 세 사람 남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
한 사람이 있었다
진지한 얘기라면 더욱 좋았고
신변잡사에 이르도록
친구등의 얘기라면 아무리 지겨울지라도
동료를 위로해줄 줄 하는 사람
한 사람이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던 나날들
어느 날인가는 수유리 개울짝에 발을 담고 올려다 보는
하늘같이 넓은 시야
우주에 가득차고 남은 철학을 벗삼아
고독하지만
결코 허리를 굽히지 않고, 곧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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