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2월 24일 경남 김해 출생
197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가입
1985년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사건으로 구속
1987년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투쟁지도부 상황실장)
1990년 12월 6월 위암 투병 중 사망
1990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김병곤은 1987년 12월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 점거농성사건(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되어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외래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진행성 위암 3기라는 판정을 받고 3년에 걸친 오랜 투병생활 끝에 1990년 12월 6일 사망하였다. 김병곤은 교련철폐 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3월 서울대학교 상과대에 입학해 ‘한국사회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 활동하며 점차 사회비판 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3년 10월 서울대에서는 유신에 반대하는 첫 시위가 벌어졌고 연행된 200여 명의 서울대 학생 가운데 그를 포함한 총 23명이 구속되었다.
김병곤은 1974년 4월에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과 함께 군사법정에서 21세 최연소자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당시 그는 최후 진술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것에 대해 “영광입니다”라고 외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복역 중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75년에 사면조치로 석방되었다. 1978년 2월 ‘한국기독청년협의회’의 간사로 사회운동을 재개한 김병곤은 ‘동일방직 오물투척사건’ 현장 사진을 배포한 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2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쳤다. 1980년 5월 17일, 김병곤은 포고령 위반으로 다시 구속되었으나 다행히 공소 취하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1985년 7월, '전두환 방미 반대 기자회견' 사건으로 인해 다시 구속되어 수감되었다. 춘천교도소 수감 당시 김병곤은 재소자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해 교도관들에게 외부진료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리고 1987년 7월 공주교도소로 이감된 뒤에 출감했으며, 출감 후에 김병곤은 같은 해 9월에 민청련 부의장에 선임되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정책실 차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7년 12월 16일 ‘구로구청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구속,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 6월, 김병곤은 자신의 건강에 이상을 느껴 교도소를 상대로 외래진료 요구 투쟁을 벌인 뒤 가까스로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로부터 진행성 위암 3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김병곤은 고통스러운 투병 시간 속에서도 끝까지 민중들의 고통을 떠올리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1988년,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0년 12월 6일, 3년간의 오랜 투병생활 끝에 3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병곤의 민청학련 사건 최후진술 『김병곤 약전』내용 중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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