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2월 11일 경남 마산 출생
1979년 2월 철도고 졸업
1979년 3월 서울공대 기계설계학과 입학
1979년 서울대 가톨릭학생회 활동
1982년 12월 1일 군에 입대
1983년 12월 11일 녹화사업을 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3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한희철은 19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 후 동아리인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시작해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민주화와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2년 12월 1일에 군에 입대하여 근무하다가 1983년 10월 28일 정기휴가를 받았다. 그가 휴가 나올 당시는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시기였다. 한희철은 이로 인해 수배 중인 운동권 학생들이 도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도와주려다 이 사실이 보안사에 발각되었고 휴가복귀 후 부대근무 중 1983년 12월 6일 보안사령부로 연행, 이 사건으로 군부대 녹화사업을 받게되었다.
녹화사업으로 입대 전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야학연합회 사건 관련 혐의로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5일 동안 취조를 받고난 후 12월 10일에 석방돼 부대에 복귀했고,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새벽 4시 30분경 그는 부대 내 문서 보관창구 앞 보초서는 자리에서 가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82년 5월 8일
‘理想’을 잘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이상’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식품처럼 ‘이상’을 간직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 ‘개인적인 욕망’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나는 ‘이상’을 ‘민중의 보편적 염원’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이상’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民族’을 잘 생각해보자. 분명 民族은 살아있는 실체이다.
노예가 되었을 때 쇠사슬을 부수며 해방되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실체였다.
그러나 이 한반도란 땅에는 이 民族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노예로 만드는 또 다른 실체가 있었다.
분명 우리 民族은 분노할 줄 알았었다.
그래서 그들을 친일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우리 民族의 범주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은 실패로 돌아갔다.
民族의 역량이 친일민족반역자를 타도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탓이었지.
자! 지금 우리 민족의 현실은 분단 현실이다. 허리에 철책을, 쇳조각을 박아 피 흐르는 현실이다. 아픔마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상처가 큰 현실이다.
우리 진정한 ‘민족’은 철책과 쇳조각을 뽑아내어 민족의 끊어진 몸뚱이를 붙이려고 갈망하는 자와 노력하는 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잘라진 몸 뚱아리를 각성시키는 자도…
그러나 한반도에는 ‘민족’이 아닌 자들도 많다.
민족의 허리에 철책과 쇳조각을 유지시키는 모든 자들! 이데올로기들! ‘노력’을 탄압하는 자들!
잘린 민족의 현실적 아픔을 망각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자들!
분단으로 인한 모든 현실로 인해 편해진 자들!
- 통일을 향한 싸움이 전제되지 않고는 우리는 聖化될 수 없다. ‘소외’에서 해방될 수 없다. -
나는 울톨릭 회원들이 민족의 삶을 택하여, 함께 어깨 걸고 걸어 나가는 동지들이 되길 기다린다.
- 한희철 열사가 남긴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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