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1월 20일 경북 울진 출생
1984년 3월 세종고등학교 입학
1987년 3월 한양대학교 섬유공학과 입학
1987년 12월 부정선거규탄 구로구청 점거농성 참가
1988년 6월 한양대 전방입소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
1988년 검찰청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전대협 구국결사대 대원)
1988년 11월 집행유예로 출소, 노학연대 동아리(‘삶과 노동’) 활동
1989년 3월 공과대학 학생회 홍보부장
1989년 5월 故이철규 열사 사인규명을 위한 12일 노천단식투쟁 전개
1990년 3월 제18대 총학생회 반미소위원회 위원장, 건설 일용직 노조 활동
1990년 11월 8일 한양대학교 옥상에서 투신 사망
1990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최응현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휴학, 복학을 반복하며 서울시 노원구에 있는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어렵사리 노동일과 함께 일용직 노조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0년 11월 8일, 민주화를 갈망하며 모교인 한양대 공대 건물에서 투신하여 사망하였다. 최응현은 어려서부터 그가 무척이나 존경하고 따랐던 그의 맏형 최응석(강원대 자민투 활동 중 구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또 자신의 아우인 최응선이 초대회장을 맡고 있던 대원고 사회비판 동아리인 ‘목마름’을 지도해주기도 했던, 가슴 따뜻한 아우이자 형이었다. 더욱이 그는 동생 최응선의 절친이자 1991년에 분신, 사망한 안동대 열사 김영균에게 있어서는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최응현은 한양대 입학 후 1987년 6.10항쟁, 같은 해 12월의 구로구청 부정선거항의 점거농성 사건, 1988년 전방입소반대투쟁위 부위원장 활동, 1989년 조선대생 故이철규 열사 사인 진상규명 요구 노천단식 투쟁 등에 적극 참여하며 민주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비록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지만 그는 결코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 11월 8일 오후 12시 40분경, 민주화 투쟁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과 구조적 현실에 분노하며 짧은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모교인 한양대 공과대학 교육관 6층에서 투신하였다.
“동지들에게 후배들에게 자랑스럽지는 못할지라도 떳떳하게 남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은 해봤지만 주위조건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폐인이 되어진다…끝끝내 동지들에게 힘을 줄 수 없는 나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 최응현의 유서 중 -
“현재 나 자신이 스스로 나 자신을 변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해졌어요.
그냥 흐르는 세월에 몸만 맡겨 놓은 셈이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생활하면 50일간의 생활과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내 몸속으로 민중들의 어려운 삶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단순히 지식이나 사상 실천의 천박함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구조적인 모순이라는 말이 실감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반민중적으로 살아 왔는가, 얼마나 편하게 지내왔고, 내가 고통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민중들에겐 일상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을,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두려움, 고통, 계속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가겠습니다.
"형을 존경합니다. 몸 건강히 잘 계세요.“
-최응현의 글 「응석형에게 보낸 편지」내용 중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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