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3월 4일 서울 출생
1981년 환일고등학교 입학
1984년 3월 서울대 서양사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중 수차례의 구류를 삶
1986년 5월 20일 학내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
1987년 4월 23일 군 입대
1987년 9월 8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7년 운경 공원묘지 안장
2014년 8월 30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
최우혁은 1984년 서울대에 입학, 학생운동 동아리인 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하여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석하였다. 1986년 하반기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현장 활동을 준비하였고, 과외를 하여 수배자를 돕기도 하였다. 군 입대 직전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노동현장으로 이전을 준비하였다. 최우혁은 경찰에 구류와 부상을 당한 후 가족들의 권유에 의해 1987년 4월 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9월 8일 부대 내에서 분신한 상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최우혁은 훈련소에서부터 보안사령부 및 보안부대, 지휘관 및 부대 군종부에 의해 보직이 변경되는 등 일상생활 깊숙한 부분까지 체계적으로 관찰·관리되었다. 운동권 출신 관찰 사병이라는 사실이 부대원들에게 알려져 얼차려, 언어폭력 등 차별 대우를 받았고, 유격훈련 중에는 조교의 구타로 팔에 부상을 입기까지 하였다. 다만 최우혁이 분신을 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부정할 특별한 증거는 없고, 달리 최우혁의 사망에 직접적으로 공권력이 개입하거나 타살되었다고 인정할 정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있어 분신이 갖는 의미는 ‘저항할 다른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적극적인 항거의 표시’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는 바, 최우혁이 분신에 이르게 되었던 동기와 과정에 위법한 공권력이 개입되어 있다면 최우혁의 죽음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 살아서는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온다 ... 하늘은 너를 닮아 투명한 푸르름이지만 네가 누운 땅은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구나. 한 여름에도 이불을 감고 자던 네가, 옷도 살도 없는 지금 뼛속 깊이 엄습해오는 냉기에 치를 떨며 인정없는 피붙이들을 원망하고 있을 것만 같다. 네 무덤에 솜이불을 덮어주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남들은 알지 못할 거다 ... 대학교 신입생 티를 면하면서부터 네 삶의 목적과 그 길은 조금씩 분명해졌던 듯 싶다 ... 교내의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크고 작은 부상을 안고 오거나 아예 며칠씩 귀가할 수 조차 없었던 때에는 가족들의 근심을 샀다. 최루탄 가루를 잔뜩 뒤집어 쓰고 들어왔던 어느 날엔 네 머리카락들 속에서도, 벗어놓은 교련복 속에서도 뽀오얀 가스가 피어올라 빨래하시던 어머니도 나도 모두 눈물을 흘렸어 ... 도대체 이 땅은 얼마나 더 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원하는 것인지, 왜 너희들은 보장된 안락을 마다하고 굳이 가시밭길을 가려 하는지에 ... 처절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 우리 중 아무도 네게 넌 옳지 못하다‘라고 말할 수 없었으면서도 그저 ... 네가 시류에 거스르지 않고 ... 둥그런 인간이 되었으면 걱정이 없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두 번이나 휴학을 강요했었다 ... 군입대를 앞두고 ... 우리의 마지막 겨울을 기억하니? 떡볶이와 꼬치 국물을 나누며 추위를 털어냈던 대학로의 한 모퉁이 말이야
...
우혁아! 내 동생아!
그런데 내가 이 누나가 어떻게 네가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갔다고 날 타이를 수가 있겠느냐! ... 아무리 네 누운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난 믿을 수가 없다. 그 어떤 이유로도 명분으로도 넌 우리 앞서 떠날 수는 없는 거잖니!
- “보고싶은 우혁아”, 누나의 추도글, 1988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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