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최동


민주화운동내용

노동민주화 운동


사망일자

1990년 08월 07일


나이

30세


직업

노동운동가


관련자인정

2001/08/28 (26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60년 8월 14일 서울 출생

1980년 3월 성균관대 입학

1984년 10월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1989년 9월 8일 인천, 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 집행유예로 출소

1990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경 한양대 사회과학대에서 분신하여 사망

1990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2014년 4월 26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2. 민주화운동 내용

최동은 성균관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그 뒤 부천의 프레스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1987년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를 결성해 활동하다 1989년 4월 국가보안법 혐의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때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20여 일 동안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에 대한 후유증으로 그는 칫솔대를 날카롭게 갈아 자신의 목을 찌르고 머리를 양변기에 찧으며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출소 뒤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겪으며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결국 1990년 8월 7일 최동은 한양대에서 분신으로 생을 마쳤다.

3. 열사 관련 기록

“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었습니다.”

- 최동의 유서 중 -



“고 최동은 1983년 5월 25일~26일 동료 8인과 함께 교내시위를 주도하고 ‘학우여! 광주사태를 기억하자’라고 구호를 외치고 ‘폭력정권 타도하라’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길음시장, 청량리로타리, 영등포 연흥극장 등에서 시위 도중 피검되었습니다. 복역 후 고 최동은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운동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반독재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학생운동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고 최동이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던 근로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민주화는 표리관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광주항쟁의 한 계기가 박정희 개발독재의 최대 피해자인 기층 서민의 분노에 있다고 한다면 고 최동의 노동현장 투신은 광주항쟁 정신의 진정한 계승과 확산에 기여한 것입니다.

노동현장에서 ‘인천부천지역 민주노동자회’ 활동 중 1989. 4. 28. 고 최동은 치안본부 홍제동 분실에 영장도 없이 강제연행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차마 인간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가혹행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고문은 그의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파괴했습니다. 9월 18일 출소치료를 위해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그 후 그는 극도의 무기력, 불면증, 수전증, 심지어는 발작과 실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군사정부는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학살했듯이 양심적 젊은이의 건강한 삶을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 최동 지도교수 김시업 성균관대 국문과교수 진술 1997. 7.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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