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정만진


민주화운동내용

‘인혁당재건위’ 사건 수감, 고문·가혹행위 후유증 사망


사망일자

1998년 08월 04일


나이

59세


직업

자영업


관련자인정

2011/11/29 (357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40년 2월 10일 만주 흑룡강성 출생

대구 영남중학교 졸업

대구 영남고등학교 졸업

1958년 3월 대구대학 법학과 입학

1961년 4월 1일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 제정 반대 시위 주동으로, 집시법위반으로 구속, 위 대학교에서 제적

1961년 7월 위 사건 관련 5.16혁명재판소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징역10년 선고

1962년 4월 18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

1963년 8월 대구 대학교 복학

1964년 7월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수사

1964년 8월 대구 대학교 졸업

1970년 9월 이래 목욕탕 경영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긴급조치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예비음모죄, 반공법위반죄로 징역20년, 자격정지15년 선고

1982년 3월 3일 대전교도서에서 형집행정지로 출소

1998년 8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

2008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무죄 선고

2014년 9월 15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2. 민주화운동 내용

정만진은 대구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장면정부의 2대 악법(반공법, 데모규제법) 제정시도를 무산시키기 위해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의 지원 속에 2대악법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4월 구속되어 복역 중, 1961년 5.16쿠데타로 혁명재판소에 이관되어 징역10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 1962년 4월 대통령특사로 석방된 후, 4.19 이후 민민청, 민족자주중앙협의회(민자통) 활동에 참여하였다. 1964년 소위 ‘1차인혁당’ 사건에도 연루되어 구속수사를 받고,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 때에는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상북도지부’에 참여하고, 1971년 4월 22일 민주수호경북협의회의 11인 준비위원회의 1인으로서 민주수호경북협의회의 발기에 참여하였고, 동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조직한 ‘민주수호경북협의회 공명선거감시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왔다. 1974년 4월경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과의 인적 연계와 학생운동 지원활동, 긴급조치 비방 등을 이유로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예비음모죄, 반공법위반으로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82년 3월 3일 대전교도서에서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고, 1998년 8월 4일 ‘인혁당재건위’ 사건 조사과정에서의 고문, 가혹행위와 수감생활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008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재심에서 "수사과정에서 지속적인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이 있었다"며 진술의 임의성과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 무죄를 선고했다.

3. 열사 관련 기록

“중앙정보부에서 사법경찰관은 전연 허위사실로 본피고인을 강제로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공소장과 같은 범죄사건을 하나하나 만든 것입니다. 당시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한 예로 하재완의 노트 관계로 전신을 꽁꽁 묶어서 물고문과 구타를 어떻게 당했는지 일주일 동안이나 피소변을 누는 등 전신을 움직일 수가 없었으며 본피고인과 같이 죄인을 만든다면 누구나 20년 짜리 죄인이 안될 사람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보부에서의 자필진술서는 수사관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쓰게 했으며 이에 불응하면 계속 고문을 가했던 것입니다.

...

검사님 조서당시 본피고인은 1969년 7월 이후 하재완을 만난 사실도 없었고 고문으로 허위사실을 강제 만든 것이다 라고 사실대로 밝혀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죽여줄 터이니 유언장을 쓰라는 등 위협하면서 말을 안듣는다고 정보부 지하실에서 갖가지 고문을 하여 정보부서의 조서 내지 자필진술서대로 시인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고문을 당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잠을 재우지 아니하였으며 정보부의 허위작성된 조서 내지 자술서를 검사님 임의대로 구체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정만진, ‘상고이유서’ 1974. 12. 9. 중 일부 -



“진술인은 고 정만진의 처이며 정만진은 인혁당사건으로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적법절차가 무시된 불공정한 재판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하였으며, 출감 후에는 평생을 감시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입니다.

...

남편 정만진은 인혁당사건 당시 목용업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화운동의 학생 주역으로서 대구대학 3학년 재학 중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5.16 군사쿠데타 후 특별법 위반죄로 10년형을 확정받고 1년만에 대통령 툭별사면된 바 있습니다. 남편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학생운동의 선두에서 끊임없이 투쟁했기 때문에 민청학련 배후 조종자로 지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정만진의 처 진술 2001. 5.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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