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4월 20일 전남 고흥군 남양면 대곡리 출생
남양초등학교를 졸업
1979년 12월 9일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이발소를 개업
1980년 8월 13일 부친과의 말다툼으로 동대문구 이문 1동 파출소에 신고·연행되어 청량리경찰서로 이송
1980년 7월 29일 국가보위입법회의 삼청계획 5호 및 1980. 8. 4. 발동된 계엄포고령 13호에 따라 재판절차 없이
삼청교육대 분리심사위원회의 심사에서 B급 판정을 받음.
삼청교육대에 입소하여 순화교육을 받고 근로봉사를 함
1981년 6월 20일 감호생집단항의사건 과정에서 경계병들의 발포로 총상을 입고 병원 후송 중사망
- 서울 금곡묘지 안장
2014년 5월 27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전정배는 1952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남양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서울로 올라와 1974년 김선엽씨와 결혼하여 1979년 12월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였다.
1980년 8월 13일 부친과의 말다툼 과정에서 동대문구 이문파출소에 신고·연행되어 청량리경찰서로 이송된 후, 1980년 7월 29일 국가보위입법회의 삼청계획 5호 및 1980년 8월 4일 발동된 계엄포고령 13호에 따라 재판절차 없이 삼청교육대 분리심사위원회의 심사에서 B급 판정을 받고, 삼청교육대에 입소되어 순화교육을 받고 근로봉사를 하였다.
보호감호처분을 받고 사단 감호분소에 수용되던 중, 군 지휘관들의 폭행을 계기로 감호생들은 정식재판을 받게 해줄 것 등 13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집단 시위를 벌였다. 당시 감호생들은 아무런 재판도 받지 않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오다시피 삼청교육대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대부분 순화교육과 근로봉사만 마치면 집으로 보내 준다는 약속을 믿었으나 그것이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언제 풀려날지 모른다는 절망적인 심리상태에 빠져있었다. 전정배를 비롯한 감호생들은 삼청교육 입소의 부당성과 감호처분을 내린 것 자체의 부당성과 아울러 감호생에 대한 처우가 공정하지 못한 점을 누차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정화위원장, 의정부지청장, 사단장 등과의 면담을 요구하였으며, 한편으로 감호생은 죄수가 아니므로 삭발시키지 말 것, 존칭을 사용해 줄 것 등 감호소 내에서의 처우개선과 인권존중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당한 요구에 대해 군은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발사하여 과잉진압, 6명에게 총상을 입혀 그 중 전정배가 사망하였다.
“전정배는 사망 당시 발생한 삼청교육대 감호생의 집단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 삼청교육 입소의 부당성과 감호처분을 내린 것 자체의 부당성을 주장하였고, 이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조치하에서 이루어진 불법연행, 구금 등에 대한 항의이자, 사회보호법에 의한 감호처분에 대한 항의로 위법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정배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고, 이 사건에 관하여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진정배 및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 등의 심의를 요청하며, 삼청교육대 실시에 대한 진상조사와 피해자 구제 등에 대한 조치를 국가에 권고키로 하고, 이 사건의 진상을 공표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규명 결정 2002. 9.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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