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안치웅


민주화운동내용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사망일자

1988년 05월 26일


나이

25세


직업

대학생


관련자인정

2010/07/12 (315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63년 10월 17일 전남 정주시 출생
1982년 3월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 서울대 학술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 등에 가입 활동
1983년 11월 3일 학생의 날 학내 시위에 참여한 사실로 관악경찰서에 연행
1985년 3월 28일 부평역 가두시위로 구류
1985년 4월 10일 노동운동 탄압 규탄 대회로 구류
1985년 6월 29일 구로공단 내 대우어패럴 근로자들의 농성에 참여한 사실로 구속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법률위반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김해교도소에서 수형 생활
1986년 7월 4일 만기 출소
1987년 9월 복권되어 같은 해 특례 입학, 국제경제학과 4학년 2학기 수료
1988년 2월 대학 졸업
1988년 5월 26일 지속적 감시사찰을 받는 상황 속에서 외출하였다가 행방불명 됨

2011년 5월 29일 마석모란공원에 가묘 조성

2. 민주화운동 내용

안치웅은 1982년 서울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1985년 6월 29일 구로동맹파업 관련 대우어패럴 농성사건에 관련되어 징역 1년을 복역하였고, 1987년 9월 4학년 2학기에 복학하여 1988년 2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는 1988년 5월 26일 아침식사 후 평소와 같이 외출을 한 후에 행방불명되었다.

안치웅은 서울대 학술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와 ‘민주화추진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면서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983년 시위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을 소지하여 같은 해 11월 3일 학생의 날 학내시위에 가담하여 관악경찰서에 연행되고, 1985년 3월 28일과 4월 10일 부평역에서 노동운동 탄압 규탄대회에 참석하여 각각 구류 7일과 3일을 받았다. 안치웅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사실 중 대표적인 것은 1985년 6월 29일 구로공단 내 노동조합의 동맹파업과 관련하여 대우어패럴 근로자들의 농성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징역 1년형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수형생활은 부산교도소(구 김해교도소)에서 하였으며, 교도소 내에서도 순화교육(전향공작의 일종)을 거부하고 서적반입 금지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을 계속하였는데, 이 같은 단식농성 및 체벌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후 1986년 7월 4일 형기를 종료하고 만기 출소하였다.

안치웅은 출소 후 지속적으로 감시 사찰을 받아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감시상황은 안치웅의 실종 직전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즉 안치웅은 당시 가장 중요한 국가보안법 조직사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구성원이었고, 대우어패럴 농성 사건으로 구속 후 출소한 안치웅은 민추위 지도부 일부가 여전히 검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배자 검거를 위한 중요한 탐문 조사 대상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치웅은 더욱이 형사들을 따돌리며 노동운동과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치웅의 실종이 발생한 것이다.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는 2010년 7월 12일 재심의를 통해 안치웅의 행방불명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발생한 것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듬 해인 2011년 5월 29일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23년 전 실종된 亡 안치웅 씨의 초혼장이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는 '안치웅 동지는 행방불명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통해 "역사가 진실을 안다면 안치웅은 행방불명이 아니다. 의문사가 아니다"라며 "독재자들에 의한 타살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독재자들은 안치웅을 사회와 역사로부터 은폐하려 했지만 결코 은폐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와 같은 죽음들이 형태만 달리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3. 열사 관련 기록

“이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은 올바른 정당한 것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정치적인 그리고 양심적인 개인의 결단과 학생운동의 한 실천으로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현정권의 모든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탄압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며 자신의 이익과 안일을 위해서 양심과 정의의 소리를 저버리는 한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나 정치제도의 보장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와 경제활동, 사회적 제도등의 모든 분야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노동문제에 대해서, 한국사회의 모순점에 대해서 그 문제를 제기하고 진정으로 누구나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휴머니즘과 민중의 입장에 선 것만이 진정한 실천적인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학생운동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집단적 운동으로 정치세력화하여 왔으며, 그것은 60년 4.19혁명 이래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모순점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학생운동의 단면만을 왜곡 과장하거나 구속 구류 등의 조치로써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인 것입니다. 지식인의 올바른 현실인식이 실천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힘으로 체계화되기 위해서 민중지향이라는 방향성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현장에의 취직은 그러한 기층민중의 현실 변혁요구에 대한 반영인 것입니다“

- 안치웅의 「항소이유서」1986. 3. 10. -



“대우어패럴 관련자로서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기억납니다. 이름이 정확히 안치웅이었는지 안재웅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동향관리대상지 40~50명을 홀터로 관리하였는데, 그 명단에 대우어패럴 관련자가 있었고,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이름이 안치웅인지 안재웅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뿐입니다. 또한 그 명단에 있었던 안치웅 또는 안재웅에 대한 동향보고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대공 주재형사가 동향을 확인했다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준하는 동향 관찰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합니다... 당시 보안사 조정관들이 제 업무와 관련된 명단, 보고서 등을 수시로 가져갔습니다.”

- 당시 안치웅 관할 경찰서 경찰관 진술 -



"요즘은 바나나가 '한 다발'에 몇 천 원 안 하죠? 근데 우리 치웅이가 실종됐던 때에는 바나나 '한 개'에 몇 천 원씩 했어요. 치웅이 어렸을 때 바나나 엄청 먹고 싶어 했는데, 그걸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길거리에서 바나나 파는 사람만 봐도 자꾸 죽은 치웅이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요 ... 이제라도 아들의 명예가 절반이나마 회복된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신도 찾지 못하고 이렇게 장례식을 치른다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 안치웅의 ‘초혼제’를 앞두고 안치웅의 母 백옥심여사의 진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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