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5월 5일 경남 하동 출생
1956년 3월 경남고등학교 졸업
1962년 3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과 졸업
1963년 부산일보 입사
1964년 조선일보 입사
1965년 동아일보사 입사
1975년 3월 17일 ‘부당해임 항의 농성사건’과 관련 동아일보사에서 해직 당함
1977년 5월 17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2대 위원장에 취임
1978년 10월 26일 ‘민주인권일지사건’으로 구속
1978년 12월 4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
1979년 5월 9일 1심에서 2년 선고(구형 5년)
1979년 8월 8일 2심에서 항소 기각
1979년 12월 4일 구속 집행정지로 석방
1979년 12월 17일 옥중에서 얻은 간암으로 원자력병원 입원
1980년 2월 14일 자택으로 옮겨 투병
1980년 2월 29일 사망. 일산 기독교공원묘지 안장
2016년 10월 08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안종필은 동아일보 재직 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항거하다 해고당한 후 해고된 동료들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를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선도해왔다.
그는 동아투위의 '민주인권일지'에 대한 긴급조치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후인 1979년 12월 중순 간암 진단을 받았다. 이때 병원 측은 “영양섭취가 제대로 안되어 병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고 밝혔다. 실제 안종필은 1979년 10월 중순부터 출감하기까지 두 달 동안 극심한 피로와 소화불량으로 거의 식사를 못했다. 자신이 간암임을 알고서도 그는 놀랄 만큼 담담했고 투병의지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으나 투병 중 사망하였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안종필이 동아투위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계와 인간적 고뇌까지도 보살피고 감싸준 자상한 분이면서도, 동시에 동아투위원 모두가 한사람 빠짐없이 자유언론의 큰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준 신념과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아투위가 이나마 오늘의 모습, 오늘의 정신으로 있게 된 것은 안 위원장의 포용력 있는, 그러면서도 원칙에 있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은 고인의 투쟁방침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옥중에서>
“동아투위가 좀 더 전투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감옥에 들어온 이후 줄곧 동아투위가 앞으로 어떻게 싸워나가야 되는가를 생각했는데 내가 얻은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각계각층과 유대의 폭을 좀 더 넓히고, 특히 각종 출판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잃어버린 70년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가능한 한 이를 출판하여 널리 알려야 한다.”
<원자력병원 병상에서>
“나는 꼭 일어난다. 동아투위 5년이 기적이었듯이, 나도 반드시 일어나서 기적을 이루고야 말겠다. 반드시 일어나서 꼭 동아일보에 복직해서 기자생활을 한번 더 하고야 말겠다. 고난밖에 없었던 우리 동아투위에, 기적의 기쁜 소식을 반드시 전해주겠다. 그리고 내가 죽었을 때 우리 백여명의 동지들이 받을 충격과 정신적인 부담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 亡 안종필의 남긴 말 -
“여보시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여보시오 안종필 위원장
딱 5년만 더 살아도 되는데 그냥 가버리십니까
여기 당신의 가족인 유족과 동지들의 통곡 가득차 있는데
빈 인사말 한마디! 당신을 못가게 붙들려고 이렇게 모였는데
안종필 위원장 그냥 영영 못오는 길 열령길 가버리십니까
...
분합니다. 진정코 분합니다
우리가 이룩하고야 말 민주주의를 위한 영령이여 자유의 영령이여
그 타는 목마름의 민주주의 못보고 가버리는 당신의 죽음이
참으로 분하고 분합니다
고이 가소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안종필 위원장 가소서 가소서”
- 고은, 「弔詩」, 1980. 3.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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