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곽현정


민주화운동내용

건국대점거농성사건


사망일자

1988년 04월 11일


나이

22세


직업

대학생


관련자인정

2002/06/12 (44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66년 10월 24일 전남 목포 출생

1982년 수유여중 졸업

1985년 2월 11일 풍문여자고등학교 졸업

1985년 한신대학교 신학과 입학

1986년 11월 30일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애학투 결성식’ 참여

1988년 4월 11일 성지교회 2층 자택에서 사망

2014년 4월 26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2. 민주화운동 내용

곽현정은 1986년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에 참여하여 구속된 후, 115일 만에 출소(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하였다.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의 진압과정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으며 경찰은 학생들을 구속하는 중에도 구둣발과 몽둥이로 짐승처럼 폭행하고 폭언을 일삼았다. 곽현정은 그들의 악랄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1987년 봄학기와 가을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휴학하였다.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이전과 이후에도 수 차례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를 사는 등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곽현정은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자결했다.

3. 열사 관련 기록

“당시 현정이는 작고 왜소한 체구에 비해 굉장히 열정적이고 또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많은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토론에도 굉장히 진지하게 임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고 한번 결정한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그 일을 실행하는 용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현실의 큰 벽에 부딪혀서 괴로워할 때면 위로해 주기도 했고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도 하였습니다. 또한 당시에 저와 같은 소위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교공부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에 비해 현정이는 학과공부에도 열심을 내는 성실한 친구였습니다.”

- 인우보증인 김찬수 진술 중 -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끊이지 않는 인해전술과 최루탄공세는 눈뜨고 지켜볼 수 없는 지옥의 도살장과도 같았다. 문하나만 깨지면 건물 안의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개같이 끌려가야 할 판이었다. 모두들 이성을 잃었다. 그 누구도 침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좋은 무기였다. 심지어는 화장실의 세면대와 변기까지 깨서 사용하였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숨이 턱턱 막혔다 ... 놈들은 정말 악랄했다. 무릎까지 차오른 최루탄 물 속에 손을 머리에 올리게 하고 꿇어앉혔다. 그리곤 사회과학관 동료들이 흰빛 철모의 깡패들에게 짓밝히고 터져 나뒹구는 모습을 꼭 보게 했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잊지 않으마, 내 잊지 않으마, 원수들아’ 멀리 옥상에서 흰 깃발이, 패배의 몸짓이 발악적으로 꿈틀거렸다. 곧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검은 연기 속의 본관을 뒤로 한 채 기자들과 전경들 사이로 어기적 어기적 끌려나갔다. 결국 살아서 걸어나갔다. 동대문서 유치장 이층 ...”


- 곽현정의 수필 유고 “그날의 울분을 되씹으며”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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