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계훈제


민주화운동내용

항일운동, 반독재운동


사망일자

1999년 3월 14일


나이

78세


직업

재야 민주화운동


관련자인정

2016/01/23 (157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21년 12월 31일 평북 선천 부황 출생

1936년 보통학교 졸업 후 신성학교 입학, 1939. 졸업 (계훈제가 1학년일 때 장준하가 2학년으로 편입)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입학, 학도병 징용 거부하고 압록강쪽으로 임시정부 찾아가다가 체포,

평양근교 승호리의 시멘트 공장에서 강제 징용(건강 악화), 항일운동

1945년 환국한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

1946년 서울대 법문학부 편입, 서울대 건설학생회, 이북학생총연합 등 조직 학생운동 주도

1948년 노동운동에 투신, 대한노총인천지구연맹 조직

1949년 늑막염 발병, 폐결핵 발병

1950년 한국전쟁 와중 공군병원에서 우측 폐 절단

1960년 4월혁명에 참여, 교원노조 서울지역중앙위원, 이 무렵 김진주여사와 결혼

1962년 함석헌, 장준하 등과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결성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범국민위원회 참여

1968년 월남파병반대운동

1969년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상임운영위원

1971년 김지하 ‘오적’으로 ‘사상계’ 폐간되자, 함석헌 등과 ‘씨알의 소리’ 창간, 편집위원

1971년 민주수호국민위원회 운영위원

1973년 충남 아산 구화고등공민학교(이사장 함석헌) 교장

1973년 12월 개헌청원백만인 서명운동 주도

1974년 1월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도피

1975년 10월 28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 12월 4일 폐질환 악화로 구속집행정지 석방

1976년 3월 29일 긴급조치9호위반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2년 선고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

1978년 12월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

1979년 5월 25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선고

1980년 1월 10일 5월 25일 폐질환 위독으로 병보석 석방(서울고등법원 면소)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현상금 5백만원) 2년여 도피생활, 건강악화

1982년 포고령 위반,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금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1987년 6월항쟁 주도 성공회성당 집회 주도, 구속

1987년 7월 6일 6월항쟁 주도를 이유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기소유예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1994년 국보법위반혐의로 조사

폐질환(만성폐쇄성 폐질환) 악화로 서울대병원 등에서 투병 지속

(별세 직전에는 산소호흡기 삽관 등 위독 상태로 투병)

1999년 3. 14. 별세.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

2. 민주화운동 내용

계훈제는 일본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 민주화의 진전과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한 평생을 바친 민주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1921년 12월 31일 평북 선천 부황 출생, 1936년 보통학교 졸업 후 신성학교 입학 재학 중 장준하를 만나게 되어 이후 함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진력하게 된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입학, 학도병 징용을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찾아가다가 체포, 평양근교 승호리의 시멘트 공장에서 강제징용을 당하였고 이때 건강이 악화됐다. 이 무렵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1945년 해방이 되자 장준하의 권유로 환국한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 등을 하였고, 이어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국대안 반대투쟁’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대한노총인천지구연맹을 조직하는 등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1949년 늑막염과 폐결핵이 발병, 한국전쟁 와중에 우측 폐를 절단하게 된다. 1960년 4월혁명에 참여, 교원노조 서울지역중앙위원을 지냈고, 1960년 5.16군사쿠데타 후에는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범국민위원회 참여, 1968년 월남파병반대운동, 1969년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상임운영위원, 1971년 김지하 ‘오적’으로 ‘사상계’가 폐간되자, 함석헌 등과 ‘씨알의 소리’를 창간, 편집위원 활동, 1971년 민주수호국민위원회 운영위원, 1973년 12월 개헌청원백만인 서명운동 주도 등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1976년 3월 29일 긴급조치9호위반으로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2년 선고, 1979년 5월 25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선고 등 탄압을 받았다. 전두환정권 이후에도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되어 2년여 도피생활을 하고, 1982년 포고령 위반으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금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이후에도 1983년 노동현장인 한일스텐레스 공장을 방문하였다가 구사대로부터 구타를 당하여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부천 성가병원에서 1개월 입원 치료를 받았고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1987년 6월항쟁 주도,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등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계훈제는 별세 직전에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는 등 병상에서 죽음과 싸우면서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1999년 3월 14일 별세,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3. 열사 관련 기록

<1997. 3. 7. 금. 맑음>

“아침 6시. 눈을 떴으나 기상할 수가 없다. 현기증이 극심하다. 하나님, 진정 나를 버리시렵니까. 일어나 하나님의 일을 이제부터라도 하고서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경외하고 진실하게 사람의 일을 하렵니다.”(『미완의 자서전 흰고무신』).”


<1997. 8. 12. 화. 맑음>

“심판날인가. 바깥에 나갈 용기가 없다. 열은 계속해서 오른다. 폐포에 수분이 차서 열이 난다고. 수긍가는 얘기다. 저녁에 피곤이 겹쳐 들었다. 38도. 열이 오른다. 입원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섰다. 사랑하는 조국 이제는 떠나야 하는가. 나는 조국을 택하느냐 가족을 택하느냐 옆눈질할 겨를 없었다. 나는 조국을 택했다. 가족은 엉망이 되었다. 보상받을 길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이제 1945년 8·15의 그 날이 돌아온다.”(『미완의 자서전 흰고무신』)


<1998. 7. 27. 월. 맑음>

“이제 나는 가야 한다. 온갖 허물을 몸과 마음에 새겨 놓은 채 하나도 풀어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 누더기 셔츠를 벗아 던져야 하는데 알몸이 헌 것을 어찌하랴. 새로 나려고 애쓴 것만이라고 초월자는 기억하여 주소서. 저곳이 가까웠는가. 하나도 준비없이 가야 하나.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못 된다. 그럴진대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세상이 그어 놓았던 줄을 깬 것이다.”(『미완의 자서전 흰고무신』)


- 계훈제선생의 마지막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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