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4일 서울 출생
1990년 2월 휘문고등학교 졸업
1991년 3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1991년 3월 22일 총학생회 진군식 시위 도중 학내 진입한 전경의 직격 최루탄에 안면 부상
1991년 4월 26일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 등 집단구타로 사망
1991년 5월 14일 경찰에 의해 장례식 무산
1991년 5월 20일 장례 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2014년 4월 26일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 이장
강경대는 명지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1년 4월 26일, 선배들과 함께 ‘등록금 인상반대’와 구속된 ‘명지대 총학생회장 석방’ 등을 요구하며 교문 앞 시위를 벌이던 중 쇠파이프를 휘두른 백골단의 집단구타에 의해 폭행치사로 사망하였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들은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4월 24일 ‘상명여대 학원자주화를 위한 연대투쟁’에 참여하여 지지연설을 마치고 귀교하던 중 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되자, 즉각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난사하며 강경진압 하였고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강경대는 여느 1학년생들과 같이 선배들과 함께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하였고, 이후 경찰의 포위로 본대와 격리된 사거리 ‘시위조’를 빼내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당시 강경대는 시위대 구출을 위해 담을 넘었는데, 이를 발견한 백골단 5~7명이 다리를 붙들어 그를 끌어내려 소지하고 있던 쇠파이프로 집단구타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후 학우들이 머리와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강경대를 뒤늦게 발견하고 즉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송 도중 사망하였다. 강경대를 검진한 성가병원 박동국 외과 과장은 숨진 강경대의 오른쪽 눈썹 위가 둔기로 맞은 듯 사선 방향으로 7cm가량 찢어졌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된 상태였다고 말하였다. 강경대의 시신이 안장된 영안실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명지대생과 서총련 소속 학생 등 2,000여 명이 영안실 주변과 연세대 정문 등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후 강경대 사망사건은 전국을 한 달 넘게 태풍으로 몰아친 1991년 5월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강경대의 죽음이 ‘우연적인 치사’가 아니라,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과 함께 통치 말기의 권력누수현상을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던 노태우 정권의 이른바 ‘공안통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인식은 사실 노태우 정권이 국민들의 불만을 억압하고 민주화운동세력의 반정부활동을 탄압하는 공안통치를 오랜 기간 동안 자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1991년 11월 서울지방법원 형사부는 ‘강경대 구타 치사사건’ 1심 공판에서 서울시경 4기동대 소속 이형용 일경 등 피고 5명에게 상해치사죄를 적용하여 3명에게 징역 2년 6월에서 1년 6월의 실형을, 2명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씩을 각각 선고하였다.
“5월 4일 전국 23개 도시 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백골단, 전투경찰 해체! 공안 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궐기대회”에 떨쳐나서 해체! 백골단, 퇴진! 노태우의 하나된 함성으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강경대 열사의 죽음 앞에서도 그리고 정의에 피끓는 청년학생들이 스스로를 불사르며 외치는 자주, 민주, 통일의 함성 앞에서도 여전히 물대포와 최루탄, 몽둥이를 앞세운 무자비한 폭력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시민, 학생들을 진압하였다.
또한 노태우 정권은 신문, 방송 등 각 언론매체를 동원해 과격시위 대 강경진압이라는 양비론을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투쟁의 과정에서 국민들의 의식은 시위의 평화투쟁이나 폭력투쟁이냐를 벗어나 이러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근본 해결책은 무엇인가로 발전하고 있으며 그것은 4일 투쟁때 함께 대열을 형성하고 시위를 함께 하는 모습으로, 투쟁기금 모금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경찰에 연행되는 시위대를 구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청년학생들은 전투경찰 백골단 해체! 공안내각 사퇴! 등의 요구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파생시키는 노태우 정권의 퇴진 없이는 친구들을 살려내고 이 땅에 자주, 민주, 통일을 안아올 수 없다는 인식을 함께 하고 노태우 퇴진 투쟁에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 “공안 통치 종식을 마지막으로 촉구하며” 1991. 5. 6. 범국민대책회의 기자회견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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