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5월 7일 서울 출생
1982년 2월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시문학 동아리 ‘등’ 활동)
1984년 3월 주례여자중학교 발령
19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 가입
1989년 8월 부산 구덕고등학교 교원 해직
1989년 8월 출근투쟁 중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구속(이후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소)
1990년 1월 전교조 부산지부 교과위원장
1990년 1월 부산위생병원에서 위암 진단
1991년 3월 9일 동아대부속병원에서 위암으로 사망
1991 양산 솥밭산 공원묘역 안장
신용길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부산지부’에 가입하여 교육민주화 활동을 벌이던 중 1989년 8월 부산 구덕고등학교로부터 강제 교원해직 처분을 받았다. 1987년의 6·10항쟁 이후로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평교사들은 참교육과 교육민주화를 실현하자는 목표 아래 1989년 5월에 전교조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급기야 1990년에는 1천 4백여 명의 소속 교원들을 강제해직하면서 활동을 탄압하였다.
신용길은 19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8월에 부산지부 결성식에서 자작 축시인 '1989년 한국 여름 그리고 교육대학살'을 낭독하였다. 그러나 그가 재직 중이었던 부산 구덕고등학교 측은 이를 빌미로 그에게 강제 교원해직 처분을 내렸다. 이에 신용길은 강제 교원해직 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출근투쟁을 전개했고, 8월 25일 노태우 정권은 그를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이후 신용길은 부산구치소 복역 중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을 벌이다 그만 위궤양을 얻었고 이어진 구속적부심사에서 병보석을 허가받아 출소하게 되었다.
그는 출소 후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교육시집을 발간하는 등 전교조 부산지부 교과위원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90년 11월 부산 위생병원으로부터 위암진단을 받았고 이후 고신의료원, 광주의료원 등에서 고된 투병생활을 해오다 안타깝게도 1991년 3월 9일 동아대학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 “눈만이라도 남아 동지들이 복직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라고 유언한 뒤, 동아대병원에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였다.
“생활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의 죽음 뒤에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자.
……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우리와 같은 슬픈 역사를 살아서는 안된다.
아이들의 잠든 이마에 입 맞추듯
우리는 이 고난의 세월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리.“
- 신용길 열사의 글 「복직에의 꿈」 내용 중 일부 인용 -
“선생님은 1989. 7. 구속 때부터 1990. 11. 동아대 병원 입원까지 무려 6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다고 한다. 그 사이 우리는 선생님이 아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암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떠나시던 날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마지막으로 허공에다 글을 적으면서 수업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신 선생님의 모습은 아직 눈에 선하다. 파면당한 빨갱이 교사였지만 그는 제자들의 가슴속에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제자들은 적은 공간이지만 선생님의 이름으로 지역의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고, 고아원 방문 등의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 민주보상심의위원회에 제출된 제자 이현훈의 인우보증 내용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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