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3월 26일 전북 고창 출생
1983년 영선중학교 졸업
1984년 인천 직업훈련원 수료
1986년 대우조선 입사(공무기계부 조립2부)
1988년 진주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
1989년 5월 29일 사측의 구사대 가입 종용에 항의하며 분신
1989년 6월 4일 새벽 1시경, 부산 백병원에서 사망
1989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박진석은 중학교 졸업 후인 1984년 인천 직업훈련소에 들어가 정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1986년 5월 1일 경남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에 입사하였다. 입사 후에 대우조선 노조의 소위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89년, 대우조선의 민주노조가 5월 18일부터 기본급 인상과 주44시간 근무제 실시 및 해고자 3명의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단체교섭을 시작했으나 사측의 동결 주장으로 결렬되었다. 그러던 중 5월 29일, 사측이 노조를 탄압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구사대인 ‘상록회’를 조직하려하자 박진석이 이에 적극 항의하며 분신하였다.
당시 정부는 “임금이 동결되지 않으면 대우조선 정상화를 위한 지원 방침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사측의 노조압박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에도 사측은 5차 교섭에 이르기까지 '임금동결이 아니면 폐업하겠다.'고 협박하며 종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노조를 탄압하는 구사대를 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1989년 5월 29일, 당시 노조 소위원이였던 박진석은 조립부 반장 조희중이 나눠준 구사대인 '상록회'의 가입신청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노노 갈등을 유발하는 정권의 기만성과 사측의 횡포에 맞서, “회사는 더 이상 노동자를 분열시키지 말라. 노동조합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이어 박진석은 분신으로 입원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는 각성해라 나는 죽지 않는다. 승리의 그날까지"를 외치며 물러서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1989년 6월 4일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사용자는 각성하라
1만여 조합원 여러분
나는 죽지 않습니다.
승리의 그날까지
(회장님 불쌍한 노동자를 울리지 마십시오)“
- 박진석의 유서 내용 -
“89년 임단투 진행과정에서 초대 집행부의 어용성이 드러났고 회사의 노조방행공작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집행부 불신임투쟁과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중심으로 현장조직은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급속하게 개편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장조직에 위기감을 느낀 회사를 구사대 조직인 상록회 가입을 강요하면서 현장을 분열로 몰고 갔다. 이에 분개하며 사측의 분열공작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분신으로 항거한 박진석 열사!”
- 열사추모 문예공모 열사상 수상작 양현모의 글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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