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자 상세 내용


성명

박영진


민주화운동내용

노동민주화 운동


사망일자

1986년 3월 18일


나이

25세


직업

노동자


관련자인정

2001/05/29 (20차)


민주화운동 내용

1. 약력

1961년 10월 9일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배문중학교 중퇴
1984년 1월 ㈜동도전자 입사
1984년 7월 ㈜동일제강 입사
1985년 9월 ㈜신흥정밀 입사
1986년 3월 18일 임금인상 투쟁 중 분신 사망
1986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2. 민주화운동 내용

박영진은 어린 시절 중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왔으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23세 되던 해에 야학을 다니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시흥에 있는 동도전자에 다니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동일제강에 입사해 민주노조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후 신흥정밀에 입사하였다. 신흥정밀은 당시 부당노동 행위 및 임금 착취에 대해 조금만 항의해도 구타와 욕설을 퍼붓고 해고시키는 무법천지의 회사로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있던 회사였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서도 박영진은 동일제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 작업과 현장 실태 파악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비일비재하던 회사에서 노동민주화를 위한 활동이 여의치 않았으나 그는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흥정밀 노동자들이 1986년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했으나 곧바로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박영진은 경찰과 회사 측의 폭력적인 탄압에 항거할 수단이 없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분신을 택하였다. 그는 병원에서도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였다. 경찰은 국민들의 관심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시신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협박하여 화장을 감행하였다. 유해는 인근 야산에 뿌려졌으나 동료들이 즉시 수거하여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였다.

3. 열사 관련 기록

전두환 군사정권하에 구로공단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라는 역사적인 공동투쟁을 만들었습니다.

그 투쟁의 승리와 패배의 교훈을 가지고 이듬해, 86년 몇개의 공장의 노동자들이 다시 모여, '구로지역임금인상공동투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25살 박영진은, 독산동 신흥정밀에서 , 회사와 경찰의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하셨습니다.

박영진열사가 사망하시며, 외친 '삼반세력타도하자'는 구호는, 여전히 우리들 투쟁속에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

노동자들의 투쟁은, '삼반세력타도'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외침이셨습니다.

3월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나무에 새순이 트고 있습니다.

비정규 노동자, 벼랑 끝 철거민들, 노점상들..

열사들의 민중에 대한 열정이

따스한 봄날 기운처럼,

낮은 곳에서 투쟁하는 분들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 박영진 열사 제19기 추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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