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12일 전북 전주 출생
1990년 2일 정명여고 졸업
1990년 3월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입학
1990년 식품영양학과 대의원
1990년 교지(‘용봉’)편집위원
1991년 4월 29일 전남대에서 ‘故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분신
1991년 5월 19일 사망
1991년 5월 25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안장
박승희는 1991년 4월 29일 전남대에서 열린 ‘故강경대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도중 분신하여 5월 19일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하였다.
박승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우들과 전교조 활동을 하는 등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1990년 대학 입학 후에는 식품영양학 전공자답게 수질오염 성분이 많이 함유된 샴푸와 린스를 철저히 거부하고 비누 사용만을 고집했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환경주의자였다. 박승희가 대학 2학년이었던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틀 뒤인 4월 28일, 박승희는 부모님이 계신 목포의 고향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났다. 그리고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 하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집을 떠났다. 이어 4월 29일에 전남대 교내에서 ‘故강경대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가 열렸고, 박승희는 이 행사에 참여하여 “5월 광주 배후조종 미국 놈들 물러가라! 노태우는 물러가라! 2만 학우 단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분신 직후 주변 동료들에 의해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박승희는 5월 19일 꽃다운 19세를 일기로 불꽃같은 생을 마감하였다.
“햇살처럼 그렇게 오월을 가져다주고는
네 몸뚱이 붉은 진달래로 피워
성하디 성한 조국 사랑을
한반도 푸른 하늘에 수놓았던 승희야
불꽃이라 부르고 싶다
타는 가슴, 오월의 불씨 가득 안겨준
한 점 혁명의 불꽃이라 부르고 싶다
까딱이기도 어려운 손을 들어
힘들여 써 보인 5.1.8
그날의 함성이 다시 살아
너 태어난 목포 앞바다를 휘돌아
부산으로 서울로 혁명 광주로
푸르게 푸르게 살아오리니
몇 천 마디의 말로
너를 애도해서 무엇하리
비록 우리 눈물을 흘린다만
눈물이 꽃씨 되고
분노가 투쟁이 되어 타오르는
이 붉은 5월에
코스모스보다도 더 환한 꽃웃음 지을 그날
그날 위해
죽은 자 살아 있는 자
이렇게 마주한다
승희야, 그날이 오면
네 무덤에 승리의 꽃다발 바칠
그날이 오면
삼천리 크고 작은 길가마다
소곤대며 피어나는
코스모스 꽃무더기에
승희꽃이라
승희꽃이라 이름 지으마
그날 위해 우리 오늘
도청으로 가나니
그날 위해 우리 오늘
죽기로 싸우나니
가슴에 불을 품고 싸우나니
너 진정 자유로운 새 땅에서
길가마다 키가 큰 승희꽃으로 피어나
해방의 땅 일구는 사람들
지켜보아 주려무나
통일 조국 밝은 내일
길이길이 수놓아 주려무나“
- “승희 꽃이라 부르마” 용봉문학 집단창작시(1991)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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