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 강원도 태백 출생
1980년 2월 태백 철암고등학교 졸업
1989년 7월 안산 ㈜금강공업 입사
1990년 8월 노조부위원장 선출됨
1990년 8월 30일 농성 중 경찰 과잉진압에 의해 전신 70% 화상
1990년 9월 11일 오후 7시 45분경 사망
1990 공주 선산 안장
고향인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며 광산 노동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박성호는 1989년 7월 안산 반월공단 내 판넬과 건축용 승강기를 만드는 ㈜금강공업에 입사하였다. 당시 ㈜금강공업은 전국 10위를 기록하는 매출 신장률에도 불구하고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산재사고가 많아 노동부의 경고를 받을 정도였고 임금도 매우 낮았다. 노사동수의 노사협의회는 거의 사측의 주장대로 관철되어 노동자들의 불신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성호는 입사 후 1년여 만인 1990년 8월 10일, 민주노조를 결성하였고 동시에 노조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금강노조는 노조 신고필증이 교부되자마자 사측에 임금교섭과 단체교섭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8월 23일부터 회사에 노조인정을 요구하며 8월 29일까지 3차에 걸쳐 교섭하였으나, 회사의 거부로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8월 29일 3차 교섭에서 노조전임자 문제에 대해 공동조사를 하자고 합의하고 8월 31일에 4차 교섭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측은 교섭이 끝난 8월 29일 오후 6시 30분경, 본사와 안산공장의 관리직, 영업직 사원 200여 명을 동원하여 화물트럭에 자재를 싣고 이내 공장을 빠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노조 집행부와 조합원들은 회사 정문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항의 농성을 벌였지만, 30일 오전 6시경 사측은 경영부실을 이유로 노조에 무기휴업을 통보하였다. 사측은 회사의 기자재 반출을 감시하며 30일 오후까지 대치상태를 벌이던 상황에서 노조간부를 업무방해혐의로 고소하고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였다. 불과 2시간도 되지 않아 전경이 출동하여 강제해산과 함께 조합원 연행에 나섰다.
경찰은 사측의 휴업 통보에도 불구하고 노조가 농성을 지속하자 조합원들을 에워싸고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박성호는 생수통에 들어있던 시너를 몸에 뿌린 뒤, 경찰을 향해 “더 가까이 오면 죽겠다”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에게 다가오면서 무리한 해산작전을 펴던 중 오히려 시너를 주변 조합원들에게 흩뿌려지게 하였다. 이윽고 경찰 측 현장책임자가 라이터를 쥐고 있던 박성호의 오른손을 비틀자 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일어나 박성호와 주변에 있던 원태조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불을 끄려는 조합원들을 무차별로 구타, 연행하였다. 그리고 박성호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사고 발생 12일 후인 1990년 9월 11일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동지들!
어떻게 하면 이 야만의 시대, 탐욕스런 자본의 전성시대를 끝낼 수 있을까요?
언제쯤 우리는 열사가 꿈꿔왔던, 그래서 자신의 온 몸을 내던져 구현하려고 했던 그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매년 열사 앞에서 ‘당신의 길을 걷겠다는, 당신이 못 이룬 꿈을 이루겠다’는 그 약속을, 그 다짐을 지킬 수 있을까요? 동지들 우리는 왜? 1% 안 되는 자본가 계급과 지배계급에게 번번히 밀리고 깨지는 겁니까? (중략)
동지들!
박성호, 원태조 열사가 안산지역민주노조운동의 역사 그 자체이듯 지역의 투쟁사업장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 민주노조를 지켜내는 투쟁이 바로 열사들의 뜻입니다. 민주노조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다름아닌 우리들의 몫, 동지들의 몫입니다.“
- 2012년 9월 10일 박성호, 원태조 열사 22주기 추모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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